전기차(EV)의 성능 경쟁은 이미 ‘제로백(0→100km 가속)’ 2초대, 최고출력 1000마력 시대를 열었다. 문제는 ‘누가 더 빠른가’가 아니라 ‘누가 더 많이 팔 수 있는가’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는 것. 고성능 EV 시장은 더이상 일부 브랜드의 상징적 기술 과시 무대가 아니다. 이제는 대중화를 통해 시장 확대와 브랜드 생존을 보장하는 핵심 전략으로 부상했다.
테슬라, “가속보다 가격”을 무기로
테슬라는 모델 S 플래드로 2초 미만 제로백을 현실화했지만, 대중화 전략은 모델 3와 모델 Y 퍼포먼스에 있다. 500마력 이상의 출력을 내면서도 가격은 6만 달러(한화 약 8280만 원) 선에서 묶어두며 “가장 저렴한 고성능 EV”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OTA 업데이트를 통한 지속적 성능 강화도 소비자 접근성을 높이는 무기다.
독일 프리미엄, 전통의 무게감과 하이브리드 전략
메르세데스-AMG, BMW M, 아우디 RS 전동화 라인은 기존 내연기관 고성능 차주들의 ‘자존심’ 승계에 방점을 찍고 있다. AMG EQE, BMW i4 M50 등은 내연기관 대비 가격 경쟁력이 높지 않지만, 첨단 인포테인먼트와 안전기술, 브랜드 헤리티지를 결합해 ‘합리적 럭셔리’ 이미지를 만든다. 특히 벤츠는 레벨3 자율주행과의 결합을 통해 ‘빠른 차이자 편한 차’라는 차별화된 포지셔닝을 시도하고 있다.
중국 신흥 브랜드, “스펙·가격 동시 공략”
BYD, 니오, 샤오펑 등 중국 제조사들은 고성능 EV를 대량 생산 가능한 플랫폼 위에 올려 가격을 절반 수준으로 낮췄다. BYD의 전기 세단 ‘한(漢) EV 퍼포먼스’는 600마력 이상 출력을 내면서도 테슬라보다 20~30% 저렴하다. 이들은 배터리 자체 생산, 현지 정부 보조금, 초고속 충전 인프라와 연계해 ‘가성비 고성능 EV’라는 새로운 틈새를 개척 중이다.
일본·한국, “균형형 고성능 EV” 실험
토요타·혼다는 여전히 보수적인 접근이지만, 렉서스 RZ 퍼포먼스, 아큐라 ZDX Type S를 통해 차별화된 감성을 강조한다. 현대차·기아는 N브랜드를 중심으로 전동화 고성능 전략을 선명히 하고 있다. 아이오닉 5 N은 650마력과 e-시프트 사운드, 드리프트 모드를 탑재해 “감성까지 복원한 EV 스포츠카”로 평가받는다. 기아 EV6 GT 역시 ‘일상성과 트랙 퍼포먼스’를 동시에 지향한다.
“대중화”의 열쇠는 가격과 충전
고성능 EV가 단순한 ‘테크 쇼케이스’에서 벗어나 대중화의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가격과 충전 인프라라는 현실적 벽을 넘어야 한다. 전문가들은 “출력은 이미 충분하다. 보급을 가르는 건 결국 접근성과 유지비”라며 “보조금 정책, 배터리 원가 절감, 충전 속도의 혁신이 고성능 EV 시장을 키울 마지막 퍼즐”이라고 진단한다.
이제 고성능 EV는 단순히 ‘브랜드를 빛내는 halo car’가 아니라, 판매와 생존을 위한 핵심 전술이다. 슈퍼카의 기록을 경신하는 시대는 끝났다. 앞으로는 ‘누가 더 많은 사람에게 슈퍼카의 경험을 일상 가격에 제공할 수 있는가’가 진정한 경쟁이 될 것이다.
육동윤 글로벌모빌리티 기자 ydy33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