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 전기차가 넘쳐난다. 이제 전기차는 더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전기차라고 해서 모두 같은 전기차는 아니다. 스펙트럼도 넓어졌다. 마치 게임 속 신분제처럼, 전기차 세계에서도 가격에 따라 계급과 지위가 확연히 나뉜다. 천민부터 황제까지, 가격대별 대표 전기차들을 통해 현대판 전기차 신분도를 유쾌하게 그려봤다.
평민, 서민의 든든한 소(所): 현대 캐스퍼 일렉트릭
평민이라 부르기엔 미안하지만, 시작은 역시 현대 캐스퍼 일렉트릭이다. 최근 연식변경을 거쳐 출시된 이 도심형 전기차는 세제 혜택 후 2700만 원대부터 시작한다. 크기는 작고 출력은 84.5kW, 주행 가능 거리는 최대 315km다. 길게 달릴 생각 말고 그냥 동네 마실 나가기 딱이다. 물론 작은 차체에 쏙 들어가는 크루즈 컨트롤과 풀 디지털 계기판도 챙겼다. 한 마디로, 군말 없이 일 잘하는 소다. 소형 해치백인데 디자인만 SUV처럼 생겨선, 서민의 발 역할은 톡톡히 해낸다. 조선시대라면 아마 부지런한 돌쇠가 타고 다녔을 법한 느낌이다.
상인, 현실적인 만족을 주는 말(馬): KGM 무쏘 EV
조금 더 위로 올라가 보자. 말을 타고 장터를 누비는 상인의 위치에는 KG모빌리티 무쏘 EV가 있다. 실제로 쌍용차 시절에는 “조선 달구지”라는 별명도 있었다. 부활한 이 차, 이름부터 거칠다. 거친 외모에 실용성을 더한 무쏘 EV는 세제 전 기준 4800만~5050만 원 선. 보조금까지 반영하면 3000만 원대 후반으로 내려온다. 주행거리는 401km, 출력은 후륜 모델이 207마력, AWD 모델은 무려 413마력에 달한다. 적재공간은 크고, V2L 기능도 있어 캠핑 가면 전기밥솥도 돌릴 수 있다. 조선시대였다면 장터에 짐을 싣고 다니던 우직한 말 한 마리, 혹은 고을에서 꽤 잘 사는 상인이 타던 튼튼한 역마 정도는 될 법하다.
양반, 품격 있는 가마: BMW i5 eDrive40
이제부터는 양반 계급이다. 고급 가마에 앉아 유유히 행차하던 조선 양반처럼, 이 가격대부터는 차의 존재감이 달라진다. 대표 모델은 BMW의 중형 전기 세단 i5 eDrive40이다. 국내 판매가는 8692만 원으로, 누가 봐도 ‘이 집안 제법 하는구나’ 싶은 포지션이다. 최고출력은 340마력, 최대 토크 43.8kg·m에 달하고, 1회 충전 주행거리는 복합 기준 429km다. 디자인은 5시리즈 특유의 안정감 있는 실루엣에 전동화 감성을 얹었고, 실내는 12.3인치 클러스터와 14.9인치 커브드 디스플레이로 BMW의 최신 인터페이스를 꽉 채웠다. 조선 양반이 비단 두루마기에 갓을 정갈히 쓰고 가마를 타듯, 앰비언트 라이트, 헤드업 디스플레이, 하만카돈 오디오까지 기본 품격도 잊지 않았다. BMW i5는 전기차 시대에 어울리는 단정하고 품위 있는 양반의 이동수단이 될 수도 있겠다.
왕족, 왕의 행차를 재현: 메르세데스-마이바흐 EQS SUV
양반보다도 한 수 위, 왕족의 자리는? 이 자리에 쉽게 짐작해볼 수 있는 차는 바로 메르세데스-마이바흐 EQS SUV다. 굳이 비유하자면 어가(御駕)다. 뒷좌석에 앉으면 궁궐 느낌이다. 럭셔리에 전동화를 더해서 그런지 시트는 눕히면 요람이 되고, 내부는 아늑하다 못해 비현실적인 공간이 된다. 가격은 2억2500만 원에서 시작해 2억5000만 원을 훌쩍 넘긴다. 최고출력 658마력, 0→100km/h는 4.4초. 급한 왕명은 시간을 어기는 법이 없다. 도로 위에서 이 차를 마주친다면 알아서 비켜주는 것이 예의다.
황제, 도로 위 최강의 존재: 롤스로이스 스펙터
그냥 비싸다고 황제가 아니다. 서양기예(西洋技藝)로 넘어온 이 차는 진짜 ‘존재’로서 황제의 자리를 넘본다. 가격은 6억 원대 중반부터 시작하며, 옵션 조금 얹으면 8억도 거뜬히 넘긴다. 정숙함이 정점에 다다르고, 실내는 장인의 손끝으로 한땀한땀 마무리된다. 별처럼 빛나는 천장을 장영실이 봤다면 놀라 자빠졌을 일이다. 무게 3톤에 가까운 차체를 4.5초 만에 100km/h로 밀어붙이는 성능, 존재 자체가 압도적이다. 정체 구간에서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대목이다.
물론 전기차 세계는 계급 상승이 가능하다. 오늘은 캐스퍼 일렉트릭지만, 내일은 무쏘 EV, 언젠가는 마이바흐를 지나 스펙터까지 꿈꿀 수 있다. 열심히 충전하고, 보조금 놓치지 말고, 기회가 왔을 때 잘 갈아타는 게 중요하다. 도로 위의 계급사회, 웃자고 만든 이야기지만, 곧 다가올 전기차 시대 속에서도 신(新) 신분 사회가 그려질 수 있을 거라는 '웃픈' 이야기다.
육동윤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ydy33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