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지프 브랜드를 대표하는 랭글러 루비콘 모델의 한정판 윌리스 41 에디션 사진=스텔란티스코리아
차 브랜드는 하나의 회사가 평생 키워낸 결과물처럼 보이지만, 실제 역사는 훨씬 복잡하다. 전쟁이 낳은 이름도 있었고, 파산 직전 다른 나라 자본에 넘어간 브랜드도 있었다. 국적은 바뀌고 공장은 주인을 달리했지만, 어떤 이름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자동차 산업의 역사는 곧 ‘브랜드 생존사’였고, 그 과정은 인수합병과 재편, 그리고 정체성의 재해석으로 이어져 왔다. 마치 패션계 명가의 역사를 보는 듯하다.
>> 전쟁이 낳은 명작, 지프
지프는 격동의 변천사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브랜드다. 지프의 출발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경량 정찰차 개발 사업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의 요구에 응한 회사는 아메리칸 밴텀, 윌리스-오버랜드, 포드였고, 세 회사가 각각 시제품을 내놓았다. 이후 미군은 윌리스 차량을 주력 생산 기반으로 선택했고, 포드도 전시 대량 생산에 참여했다. 전쟁이 끝난 뒤 ‘지프’는 군용차의 이름을 넘어 민간용 오프로더의 상징으로 확장됐다. 이후 윌리스는 1953년 카이저에 매각됐고, 1970년에는 AMC로, 1987년에는 크라이슬러로 넘어갔다. 크라이슬러가 피아트와 합쳐 FCA가 된 뒤, 지금 지프는 스텔란티스 산하 핵심 브랜드가 됐다. 한 브랜드가 전쟁, 산업 재편, 초국적 합병을 모두 거쳐 살아남은 셈이다.
스웨덴의 안전 브랜드로 자리 잡았던 볼보자동차는 1999년 포드에 인수됐다. 당시 포드는 재규어, 애스턴마틴, 랜드로버 등을 묶는 프리미어 오토모티브 그룹 전략을 통해 프리미엄 포트폴리오를 확대하려 했다.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 포드는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2010년 볼보는 중국 지리홀딩으로 매각됐다. 당시만 해도 ‘유럽 프리미엄 브랜드가 중국 기업으로 넘어갔다’는 상징성 때문에 우려가 적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볼보는 지리 체제 아래에서 전동화와 안전, 디자인 정체성을 유지하며 재도약에 성공했다는 성공사례로 평가를 받는다.
이미지 확대보기인도 회사의 자본으로 탄생한 초호화 럭셔리 모델 레인지로버 SV 블랙 에디션 사진=JLR
>> 갈수록 짙어지는 영국성, JLR
재규어와 랜드로버 역시 비슷한 궤적을 그렸다. 두 브랜드는 원래 서로 다른 역사를 가졌지만, 영국 자동차 산업 재편 과정에서 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 재규어는 1989년 포드에 인수됐고, 랜드로버는 BMW를 거쳐 2000년 포드로 넘어왔다. 이후 포드는 2008년 두 브랜드를 인도 타타모터스에 매각했고, 지금의 JLR 체제가 만들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자본의 국적은 바뀌었지만, 브랜드가 시장에서 내세우는 이미지는 오히려 더 강하게 ‘영국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아는 한국 브랜드 가운데서도 변천사가 가장 입체적이다. 기아의 뿌리는 1944년 경성정공업사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후 자전거와 이륜차, 삼륜차를 만들던 회사에서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했다. 1976년에는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하며 상용차와 특수차 부문까지 넓혔고, 1998년 외환위기 여파 속에서 현대차에 인수됐다. 오늘날 기아는 현대차그룹의 핵심 축이지만, 그 내부에는 독자 브랜드로서의 역사와 아시아자동차를 흡수한 상용·군용차의 기억이 함께 남아 있다. 지금의 기아가 단순한 승용 브랜드가 아니라 전동화와 목적기반모빌리티(PBV)까지 확장하는 배경에도 이런 다층적 역사 경험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르노코리아의 출발은 삼성자동차였다. 1990년대 삼성그룹이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며 부산 공장을 세웠고, 1998년 판매를 시작했지만 외환위기 직격탄을 피하지 못했다. 이후 르노가 2000년 삼성차 사업을 인수해 르노삼성자동차가 됐고, 2022년에는 르노코리아모터스로, 2024년부터는 르노코리아로 이름을 정리해 삼성 색채를 걷어냈다. 최근에는 지리와의 협업까지 더해지며, 한국 공장에서 프랑스 브랜드와 중국 플랫폼이 결합한 차를 생산하는 구조로 진화했다. 브랜드 하나 안에 한국, 프랑스, 중국 산업사가 동시에 담긴 셈이다.
KG모빌리티, 옛 쌍용차의 역사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격변’ 그 자체다. 뿌리는 1950년대 하동환자동차와 동방자동차로 올라가고, 이후 동아자동차를 거쳐 1980년대 쌍용그룹 품에 안기며 쌍용자동차가 됐다. 그러나 그 뒤로는 대우, 중국 상하이차, 인도 마힌드라, 그리고 최근 KG그룹까지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지금은 KG모빌리티라는 이름으로 새 출발을 선언했지만, 여전히 소비자 기억 속에는 ‘쌍용’이라는 이름이 강하게 남아 있다.
GM한국사업장 역시 한국 브랜드 변천사의 중요한 축이다. 지금은 미국 GM의 한국 생산법인이지만, 그 뿌리는 일제강점기와 전후 복구기, 신진자동차, GM코리아, 새한자동차, 대우자동차를 거쳐 이어진다. 2002년 GM이 김우중 회장이 이끌 던 대우차 자산을 인수해 GM대우를 세웠고, 2011년 한국지엠(GM Korea)으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되는 브랜드는 쉐보레와 캐딜락, GMC 등이지만, 한국 소비자 기억 속에는 여전히 ‘대우차의 후예’라는 인식도 남아 있다. GM이 한국 법인을 단순 판매거점이 아니라 소형 SUV와 글로벌 생산 허브로 유지해온 점을 감안하면, 불거지는 철수설이 잠시 설득력을 잃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