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차 가격은 치솟고 임금 상승은 더디다. 이런 상황에서 ‘오래 타는 차’는 소비자에게 매력적이다. 최근 미국 중고차 분석업체의 보고서에 따르면 평균 차량이 25만 마일(약 40만km)을 넘길 확률은 8.6%에 불과하다. 그러나 토요타 차량은 이 수치를 압도적으로 뛰어넘으며 “내구성의 제왕”임을 입증했다. 현대·기아 역시 과거 ‘짧게 타는 차’ 이미지를 벗고 품질 혁신으로 내구성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전기차 시대로 접어들며 판도가 크게 달라지고 있는 만큼 앞으로의 결과도 궁금해진다.
데이터가 보여주는 토요타의 독주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토요타는 25만 마일 도달 확률 상위 10개 모델 중 무려 6개를 차지했다. 툰드라(36.6%), 세쿼이아(36.4%), 4러너(26.8%), 타코마(26.7%), 하이랜더 하이브리드(25.9%), 아발론(22.0%) 등이다. 토요타의 차량은 평균보다 3~4배 이상 오래가는 차라는 사실이 데이터로 증명된 셈이다. 반면 현대·기아 차량은 단 한 대도 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토요타의 내구성 비결: 보수적 기술과 장수 플랫폼
토요타의 내구성은 단순히 부품 품질 덕분이 아니다. 검증된 기술을 바탕으로 한 보수적 전략이 핵심이다. 터보보다 자연흡기 엔진을 선호하며 열과 압력 스트레스를 줄여 안정성을 높였고 1997년 첫 프리우스 출시 이후부터 20년 넘게 하이브리드 기술을 내재화하며 배터리와 구동계를 통합 설계해 고장률을 최소화했다.
또한, 4러너·세쿼이아·타코마 등 주요 SUV와 픽업트럭은 바디 온 프레임(Body-on-Frame) 구조를 유지해 고하중·오프로드 환경에서도 내구성을 보장한다. 하이랜더 하이브리드가 25만 마일 클럽에 포함된 것 역시 토요타 하이브리드 기술의 신뢰성을 보여준다.
현대·기아의 반격: 10년 만에 달라진 품질 전략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현대·기아는 ‘짧게 타는 가성비 차’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전략을 바꾸며 10년·10만 마일 보증 정책을 도입해 판을 흔들었다. 당시 업계 평균이 3년·3만6000마일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파격적이었다.
물론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2011~2014년형 세타2 엔진 결함으로 대규모 리콜과 화재 이슈를 겪었다. 그러나 현대·기아는 평생 엔진 보증과 무상 수리 프로그램을 도입해 브랜드 신뢰를 회복했다. 현재는 리서치 기관 조사에서 현대·기아 차량의 10년 보유율이 50% 이상으로, 과거와 달라진 내구성을 입증했다.
전동화 시대, 내구성 경쟁의 새로운 무대
문제는 전기차 전환이다. 내연기관 시대에 토요타가 쌓은 “25만 마일 신화”가 전기차에서도 이어질지는 불확실하다. 대표적 사례가 토요타 bZ4X 리콜 사건이다. 2022년, bZ4X에서 허브 볼트가 느슨해 바퀴가 이탈할 수 있는 결함이 발견되며 전 세계 약 2700대가 리콜됐다. 출시 초기부터 판매가 중단되며 토요타의 내구성 신화에도 균열이 생긴 셈이다. 하지만, 전기차는 엔진과 변속기가 사라진 대신 모터 기반 단순 구조를 채택해 내연기관보다 장수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왔다. 내구성의 평가 기준이 새로운 출발점을 세웠다는 뜻이다. 이제는 소프트웨어 문제도 있다. 이는 OTA 업데이트를 통한 성능 개선도 가능해, 차량 내구성의 기준이 완전히 바뀌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걸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현대·기아의 전동화 전략
토요타가 여전히 하이브리드 중심의 점진적 전환을 고수하는 반면, 현대·기아는 E-GMP 전용 플랫폼을 앞세워 공격적인 전동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아이오닉 5·6, EV6, EV9 등은 800V 초고속 충전 시스템을 도입해 사용자 편의성과 기술 경쟁력에서 한발 앞서고 있다.
내연기관 시대에는 엔진과 변속기의 수명이 차량의 내구성을 결정했다. 하지만 전기차 시대의 경쟁력은 배터리 효율과 소프트웨어 관리 능력으로 옮겨가고 있다. 충방전 사이클, 배터리 용량 저하, OTA 성능 최적화가 차량 수명을 가르는 핵심 요소로 부상했다.
토요타는 하드웨어 기반의 전통적 내구성 강자였지만, 현대·기아는 소프트웨어 중심 전략으로 빠르게 대응 중이다. 배터리 관리 기술과 SDV(소프트웨어 정의 차량) 역량이 향후 차량 수명을 결정하는 진짜 무기가 될 전망이다.
내연기관 시대에는 토요타가 압도적인 승자였다. 그러나 전기차와 소프트웨어 경쟁으로 전장이 바뀐 지금, 현대·기아가 토요타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다. 향후 10년, “25만 마일 클럽”의 왕좌는 하드웨어 내구성이 아니라 배터리·소프트웨어 경쟁력에서 결정될 것이다.
육동윤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ydy332@g-enews.com